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폰 파펜 (문단 편집) === 정계 입문 === [[파일:프란츠 폰 파펜.png|width=200]] 이후 [[제1차 세계대전]]이 끝나면서 군에서 [[중령]]으로 퇴역했다. 퇴역 후에는 현재의 [[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]] 주에 있는 뒬멘(Dülmen) 지역에 농지를 사서 중소 지주로 지냈다. 그러나 당시 막 세워진 [[바이마르 공화국]]은 극우들과 극좌들의 준동에 바람 잘 날 없었고, 그가 살던 뒬멘에서는 극좌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. 반공 [[왕당파]]였던 파펜은 그와 뜻이 맞는 [[자유군단]]을 이끌고 극좌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에 맞섰고, 자유군단의 지지를 받아 1920년에 신생 [[바이마르 공화국]]의 정계에 입문했다. [[가톨릭]]교도이자 [[우파]]였기에 그는 [[가톨릭 중앙당]]에 몸을 담았으나, 공화국을 대체로 인정하던 중앙당 지도부와 달리 그는 왕당파답게 공화국에 냉담했다. 그의 정치성향은 [[독일 인민당]]이나 [[독일 국가인민당]]에 가까웠다고 평가받는다. 1921년부터 [[프로이센 주]]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나 별 존재감도 없고 의정활동도 거의 없었다고 하며, 1924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 하원 총선에 출마하고자 했으나 중앙당 공천에서 탈락했다. [[1925년 독일 대통령 선거]]에서 그는 중앙당의 [[빌헬름 마르크스]]가 대통령으로 출마했음에도 전쟁영웅 출신의 [[무소속]] 후보인 [[파울 폰 힌덴부르크]]를 적극적으로 지지, 당선시키는 데 공헌하여 대통령과의 친분을 쌓은 대신 중앙당 지도부와의 사이는 극히 나빠졌다. 더불어 프로이센 주의 [[독일 사회민주당|사민당]]-중앙당 연립정부 붕괴를 획책하여 당에서 쫓겨날 뻔하기도 했다. 결국 1928년에는 프로이센 주의원을 사직하고 일단 정계에서 은퇴한다. 1930년 [[대공황]]과 [[정치극단주의]] 세력의 대두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정계에 복귀하였다. 당시 독일은 중앙당의 [[하인리히 브뤼닝|브뤼닝]] 내각이 의회 신임이 아닌 대통령 비상대권으로써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가 속한 중앙당은 원내 제4당에 불과했으나 원내 제1당인 사민당은 내각불신임을 날려버리면 제2당인 [[나치당]]과 제3당인 [[독일 공산당|공산당]]이 작당해 공화국을 결딴낼 것을 두려워해 내각불신임을 포기했기에 대통령 신임만으로 내각이 유지될 수 있었다. 반공화국 성향에 반공주의 왕당파 반동주의자였던 파펜은 대통령 신임으로만 유지되는 내각을 환영하면서도 자당의 브뤼닝 내각을 연일 공격했고 사민당 금지, 나치당 등 극우파와의 연정을 요구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